클랏사신, 시나리오에 대한 반격
이번 역은 안국역입니다. 가식적이고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지하철에 울려 퍼진다. 이 음성은 약해보이지만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순식간에 땅속을 질주한 지하철을 순식간에 멈춰 세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은 사람을 뱉어내고 또 다른 사람을 담아 또 다시 질주를 시작한다. 질주하는 지하철 뒤로 흘러나오는 거친 바람을 등지고 땅 속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 구름 한 점 없는 공허한 하늘이 나를 뒤덮는다. 가을이었다.
안국역을 나와 거리를 걷다보면 이질적이다. 전통을 지키고 있는 중이라는 인사동을 마주한 골목 사이에는 한옥 마을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골목은 깊어질수록 외국이 된다. 다양한 디자인의 옷가게, 이태리 전통 파스타 집, 최고의 향과 맛을 자랑한다는 커피집이 골목 사이사이 즐비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파스타 집이 한옥의 옷을 입고 있는 곳도 있으며 떡볶이 집과 파스타 집이 마주 본 형태의 골목도 존재한다. 이국적인 골목은 어느새 한국과 교접한다.
그 골목길을 지나 다시 대로를 따라가면 나들이를 나온 수많은 사람의 행렬과 마주친다. 노랗게 물든 은행 비를 맞으며 걷는 느낌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낭만적이다. 그 길 끝에 몽인 미술관이 있었다. 주민 센터 옆에 바로 자리한 몽인 미술관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질적이다. 작고 아담한 건물 사이에 현대적이고 세련미 있게 들어선 아트센터는 스펙터클하다. 특히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입구는 내가 마치 엄청난 부잣집에 택배를 배달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내 정신으로는 쉽게 발길을 하기 힘든 부담스러운 공간이었다.
자신 있게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관람객 하나 없이 텅 빈 공간. 온통 하얀 벽 사이로 액자 11개만 걸려 있다. 옆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아가씨가 책상에 앉아있다. 나는 어디서부터 발걸음을 해야 할지 망설인다. 잠시 공간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핀다. 2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발걸음을 옮기자 그때서야 아가씨는 나에게 눈길을 준다. 2층 역시 당황스럽다. 어두운 방 사이로 달랑 두세 명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좌석만이 있었다. 등받이 없는 좌석만이…….
스탠 더글라스의 <클랏사신>은 내가 그 작품을 보러오며 느낀 감정만큼이나 우왕좌왕하게 만든다. 서로 연관된 수십 개의 장면들이 서로 조합되어 67시간 동안 돌아간다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과정의 문장 역시 수십 개로 나뉘어져 조합되면 다양한 생각, 공간을 통해 클랏사신을 보러 온 과정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헷갈리게 될 수도 있다. 클랏사신이 가진 의미 역시 비슷한 것 같다. 67시간 중 1시간을 보았지만 난 나머지 66시간이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본 1시간이 시작부분인지 끝부분인지 도대체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영화 혹은 영상물이라 하면 시작과 끝을 논하게 된다. 시나리오라는 잘 짜여진 구성을 생각하고 발단 – 전개 -클라이맥스 – 결말이라는 구조에 따라 느낀 감정을 통해 영상물을 평가한다.
영상물이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이 영상물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게 된다. 어떤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등장하여 어떻게 되는지를 따라가며 그 과정과 결과에 따라 이야기의 장단점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영화에 대한 극대화된 매력을 느끼거나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클랏사신은 ‘가장 좋은 시나리오란 시나리오가 눈에 안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라는 시나리오 대가들의 정석을 따랐는지 시나리오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파괴한다.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는 편견을 파괴하고 내가 어디에서 창조되었고 죽음을 통해 어디로 가게 되는지 모르는 것처럼 시작과 끝이라는 모호한 지점을 파괴한다. 이와 함께 등장인물에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를 비판하던 관객들은 비판거리조차 찾지 못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두 세 사람 밖에 앉을 수 없는 등받침 없는 불편한 의자 역시 일상적인 영화관과는 다르다. 67시간동안 이 영화를 다 지켜볼 수는 없게 만든 것이다. 작은 공간에 몇 백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모여 앉아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일반 영화관과도 확연히 다르다. 몇 개의 이야기가 모순적으로 구성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을 서술방식의 기초로 삼고 있지만 <라쇼몽> 과도 다른 점은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는 관객은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어떤 부분을 보고 있는 거야라는 불편함과 앉아있는 공간의 불편함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봐야하는지 왜 이것을 봐야하는지 모르게 만드는 카오스의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영상을 보며 느낀 이런 불안감은 영상의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같은 장면을 보고 나와도 이런 것 아니었어 ? 이렇게 되는 거 아니었어 ? 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결국 남는 것은 공허함 자체다.
‘<클랏사신>은 1864년 캐나다 산맥의 숲속을 배경으로 원주민과 금을 찾고자 하는 침략자간의 충돌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작품의 배경 설명에 따르면 원주민의 족장은 금을 찾으로 온 백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백인들은 이 족장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추적을 피하며 저항을 시도했으나 화해의 증표로 가장한 담배에 속아 살인죄로 체포된다.
재판을 받게 된 원주민들은 일부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풀려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원주민을 호송하던 보안위원이 숲에서 살해된다. 살인 용의자를 둘러싼 재판이 벌어지고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리며 알 수 없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재조합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얼핏 보면 인과관계가 뚜렷하고 특정 심리를 가진 등장인물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 즉 드라마틱 플롯(Dramatic plot)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영상의 제목 <클랏사신> 이라는 의미가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라는 것을 대변하듯 이 영상의 등장인물에서는 뚜렷함을 찾아 볼 수 없다. 누가 이 영상의 중심인지 모르며 이 안에서 중심인물인 것처럼 보이는 용의자를 심문하는 재판관의 존재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대신 작가는 인과관계에 따른 스토리 구성보다 시간배열에 따른 스토리 구성을 선택했다. 같은 화면들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뱉어내는 이야기들은 지속적으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대체 이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는 없다. 지속적인 시간의 배열만이 이루어질 뿐이다. 이 말은 즉 이 영상에서 중요한 것은 Shot 아닌 Cut 이라는 점이다. Shot 은 사물을 표현해낸다. 시공간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정과 욕망을 담아내기도 한다. 물리적 크기, 앵글, 높이에 따라 인물들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지만 적절한 감정을 골라 낼 수는 없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든 행동들을 일정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영상의 시간 안에 다 담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스탠 더글러스는 67시간이라는 영상의 시간을 통해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시간의 벽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면을 롱테이크로 잡아 특정 인물을 표현하는 Shot 의 구성을 선택하는 대신 끊임없이 Shot 을 나누어 시간과 사건이 변화되는 Cut 의 구성을 선택한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리적인 도구 즉 카메라 레코딩 버튼의 시작과 끝에 의존한 선형성 보다는 시간 공간을 잘라내고 재배열하는 비선형성을 선택한 것이다. “자크오몽은 이런 Shot의 변화에 대해 ‘시각적인 작은 트라우마’ 라고 표현했다. 영화사 초기의 관객들에게 갑작스러운 쇼트의 변화는 시각적인 잔인함, 진정한 폭력을 느끼게 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스탠 더글러스는 바로 Shot의 변화에 따른 충격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다.
스탠 더글러스가 선택한 주된 표현법은 플래시백(Flash back)이다. 그는 현실에 있던 상황을 어느새 과거로 돌려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사건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를 가한다. 이 결과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며 내가 가진 기억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과거로 돌아가는 불연속적인 시간의 변화를 사용해 영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을 방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용되는 친절한 도구로 사용된다. 현실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족함을 플래시백을 통해 채워 넣어 영화의 한정된 시간을 극복하려 하지만 스탠 더글러스는 이 친절한 장치를 불친절한 장치로 사용해 버린 것이다.
스탠 더글러스가 이 복잡하고 솔직히 말해 쓸데없어 보이는 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그의 의도를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같은 영상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는 무지한 대중에게 같은 영상을 여럿이 보아도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 이를 통해 헐리웃 중심의 획일적인 영상 세계를 비판하려 한 것일까 ?
그의 깊은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얻고 싶은 것은 결국 내러티브의 본질을 깨닫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제작할 때 시나리오를 논하거나 만들려고 한다. 스탠 더글러스 역시 배경을 설명하고 인물을 소개하고 줄거리를 설정하는 등 시놉시스를 제공한다.
여기까지 기존의 시나리오 작업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르다. 그의 시나리오에는 주된 스토리가 없다. 보통 시나리오는 주된 스토리를 중심으로 부가적인 스토리들이 결합되고 가지치기 되어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는 서사구조가 있다. 스탠 더글러스는 이 과정을 생략한 것이다. 오직 에피소드가 뭉쳐 스토리가 되고 플롯이 되어 내러티브가 되는 전형적인 내러티브 생성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 결말이 무엇이고 시작의 방식이 어떻게 되어 어느 지점이 핵심이 되는 지점인지 고민하고 텍스트로 옮기는 기존 시나리오와는 다르다.
스탠 더글러스는 대신 디지털의 비선형성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쓴다. 즉 텍스트적인 편집을 통한 샷의 구성, 사건의 구성이 아니다. 시각적 편집을 통해 장면을 구성하고 사건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대만의 감독 휴사오시엔은 이야기를 쓴다는 것 즉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골라내는 것이라고 했었다. 스탠 더글러스의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배열의 재구성은 내러티브에 대한 편견을 파괴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나리오는 영화에 자금력을 행사한 텔레비전, 국가, 지역사회 등 다양한 권력 기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명확한 이야기, 전형적인 등장인물, 도덕적인 목표를 향해 점점 굳어져갔다. 투자한 자금만큼의 이익을 얻어야 하는 산업으로 발달하며 즉각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 등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스탠 더글러스는 <클랏사신> 을 통해 바로 변형된 내러티브가 아닌 원형의 내러티브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과 끝도 없다. 다 보지 않아도 된다. 고민하라. 이야기가 무엇인지. 오늘 날 전형적인 시나리오로 빠른 소비를 위한 이야기를 비판하고 1960년대에 불었던 작가주의와 같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의 재조합을 통해 써내려 간 것이다. 단지 차이는 1960년대의 작가주의는 원래의 문학적 의미를 되살린 아날로그적 회귀라면 스탠 더글러스는 디지털 편집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논하는 디지털 작가주의의 탄생을 선언했다는 점인 것 같다.
이 공간을 벗어나 수많은 생각이 끝날 쯤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역은 안국역입니다.”
┃참고 문헌 및 자료
1)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몽인아트센터 디렉터,김윤경(2009)
2) 쇼트;영화의 시작, 엠마뉴엘 시에티 지음, 심은진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6)
3) 시나리오, 안느 위에 지음, 김도훈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6)
4) 영상편집에 대한 조망, 월터머치 저, 윤영묵 역, yenee(2002)
5) 영화 분석 입문, 프랑시스 바느와, 안 골리오 레테 저, 주미사 옮김, 한나래(1997)
6) 진동_오실레이션;디지털 아트, 인터랙션 디자인 이야기, 제이D 볼터외 1명, 이재준 옮김, 미술문화(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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